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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티슬턴 성경해석학개론 칼 바르트

2%_Root 2019. 10. 3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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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따라서 "이해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배경과 경력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스위스 바젤의 칼뱅주의 전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베른에서 공부했고 나중에는 독일의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에서도 연구를 계속했다. 그를 가르친 선생들 가운데 유명한 이로는 빌헬름 헤르만, 아돌프 윌리허, 아돌프 폰 하르낙이 있는데 나중에 이들의 자유주의에 반대하게 된다. 1911년부터는 스위스 자펜빌에서 목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1915년에서 1918년에 바르트는 고린도전서에 관한 책인 『죽은 자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the Dead)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말과 인간의 말』(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에 수록될 논문 대부분을 저술했다. 이 저술들은 “자연종교”와 기독교 복음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성경 속의 낯선 신세계」에서 바르트는 “신세계는 자신을 우리의 일상 세계 안으로 투사한다. …성경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다.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했던 바르트는 1918년에 『로마서 강해』를 쓰고, 스승들의 방법론을 공격하기도 한다. 1925년에는 괴팅겐 대학, 1930년에는 본 대학의 교수로 임명된 바르트는 1934년,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의 주요 저자로서 나치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한 주 되심을 선포한다. 그에 따라 바르트는 1935년에 학교에서 해임되었고, 1962년에 은퇴할 때까지 바젤 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1932년부터 저술되기 시작한 『교회 교의학』은 바르트의 가장 주요한 책으로서 1968년 사망할 때도 여전히 작업 중이었다. 이 대작을 통해 바르트는 전 세계에 심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해석학에 대한 바르트의 초기 접근
『로마서 강해』제 2판이 나올 때까지 초기 시기(1915-1922)의 바르트의 입장은 변증법적 신학의 시기, 즉 하나님의 초월 또는 거룩한 타자성, 거룩하고 무한한 하나님과 유한하고 타락한 인류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는 신학의 시기로 요약된다. 『로마서 강해』에서 바르트는, 만일 자신이 “시스템”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키르케고르가 인간의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 사이의 “무한한 질적 구분”이라고 부른 무엇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내게는 성경의 주제요 철학의 본질이다. 철학자는 인간 지각의 저 위기를 제일운동자라고 부른다. 성경은 같은 교차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바라본다.” 초기 바르트의 성경해석학의 이중적 의미란 첫째 우리는 간접적으로나 변증법적으로 하나님께 듣고 말하기 위해서 “신앙의 유비”를 사용해야 한다. 둘째, 신앙의 유비의 언어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위기”의 신학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주석은 인문과학이나 인문과학의 토대로서의 일반적 해석학(딜타이와 같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바르트는 “우리는 심리학과 역사의 환상으로부터 깨어 일어나 성경을 향해 돌아선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성경조차도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으로 세워질 위험을 초래할수 있으므로, “나의 유일한 목적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고, 텍스트에 무엇인가를 더하지 않고는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일으키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자기 시대를 위한 신학적 주해였다. 독자들은 새로워진 믿음과 순종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학적 내용이다. 바르트와 자유주의자 스승들은 서로가 서로 때문에 충격을 받았는데, 헤르만, 윌리허, 하르낙은 바르트가 가치중립적 접근을 무시하고 성서비평을 건너뛴 듯 보인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 바르트는 바르트대로 스승의 접근법이 동시대에 독자들에게 파산 선고를 받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불트만 또한 성경의 케리그마에 대한 초월적인 속성을 강조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자를 전혀 “현대적”이지 않으며 예수와 바울의 케리그마를 진정한 케리그마가 아닌 무미건조한 “가르침”으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했다. 놀랍게도 불트만은 이런 초기의 바르트를 지지했고, 그것은 케리그마를 강조하고, 진부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견해에 동의했다. 하지만 나중에 바르트의 신학이 신화학적이라 보고 그와의 동조를 깬다. 바르트와 불트만 모두 하나님의 초월을 강조했으며 신적 계시를 표현하는 기독교적 언어가 가진 간접적이고 유비적인 본성을 역설했다.


바르트의 후기 해석학

칼바르트와 에밀브루너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즘의 위협이 증대함에 따라 바르트는 유비의 본성을 더 깊이 사유했다. 유비의 주제와 관련해서 에밀 부르너(Emil Brunner)의 입장과 결별하게 된다. 브루너는 결혼과 국가에 대한 율법을 강조하는 한편 회개의 가능성, 즉 아퀴나스가 설명한바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를 지시하는 것으로서의 회개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반면 바르트는 오직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만이 하나님의 초월과 타자성을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 보았다. (티슬턴은 이것은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르트의 중기와 후기 사유는 『교회 교의학 ⅰ/2』(영어판 1956)의 19-21장. 약 400쪽에 달하는 분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19-21장 이전 장들에서 바르트는 인류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자로 설명한다. 그리고 19-21장에 와서는 인류가 성경의 독특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주제를 다룬다. 성경을 통해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교회의 주님으로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며 모세와 선지자, 복음 전도자와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말씀에 반응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서 성경에서 그 표현을 찾을 수 있으며 동시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 되심”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우리는 “인간의 음성으로 쓰인 인간의 언어”와 만나는데 이 인간의 언어는 계시를 증언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위한” 것임을 강조한다. 『교회 교의학』의 20장과 21장에서 그는 말씀의 수용자로서의 교회의 본성에 대해, 또한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의 교회의 의미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20장에 나타난 바르트의 논의에 따르면 교회는 자체의 “직접적이고 절대적이며 그 자체로 물질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는 없지만 “성경의 권위”를 매개한다. 계시의 문제에서 결정적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바르트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표준적 성경 구절로써 딤후 3:14-17과 베드로후서 1:19-21을 인용한다). 교회는 스스로를 자기 충족적으로 여길 수도 “순종하는”교회로 여길 수도있다. 후자의 경우 교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대항한 고백교회의 바르멘 선언에서와 같이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다. 이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 아래”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가 삼위일체적 차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의 “통치 아래에서”교회의 순종은 성령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성부와 성자의 주 되심에 대한 인정이다. 성경에 대한 장들 『교회 교의학』 19-21장은 먼저 “말씀의 자유”(21장)을 통해 사명 교리에 있어 “교회의 선포”로, “윤리학”(22장)으로, “경청하는 교회라는 기능으로서의 교의학”(23장)으로 전개된다. 이 대목들은 1부의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해석학은 이러한 목적들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여기서 삼위일체가 근본적인 역할을 하며 유비와 교회도 그러하다.

평가
바르트와 불트만은 초월적 하나님의 언어가 유비적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누구보다 더 강력하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철저한 불연속성에 주목한다. 삼위일체 해석학으로 “위로부터의” 신학을 제시하는데, 성경이 인간 저자에 의한 것이며 그리스도 중심적 계시에 “증언”이라는 점, 해석학적 이해는 순종으로 귀결되게 된다. 해석학의 이슈에 대한 점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는 신학적 관점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보왈드는 해석학에는 신적 행위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고 한 바 있는데 이것은 바르트가 강조하는 점과 동일하다. 바르트가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에서 삼위일체적 관점으로 이행하면서 그리스도 중심적 관점을 뒷자리에 두지 않았다. 바르트는 나사렛 예수가 도덕적 진리나 보편적 금언을 “가르치는일” 이상을 했음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초기 저술에서 그는 키르케고르를 선용했다)

바르트는 자신의 『안셀무스 :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Anselm: Fides Quaerens Intellectum, 1930)이 『교회 교의학』의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믿음”은 하나님이 주도하는 과정이다. 바르트는 기독교 신학에서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은 러시아 공산주의, 플루트 협주곡, 죽은 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와 시간은 무엇보다 “그분이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며…그것을 참이 되게 하시는”곳에서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따라서 “이해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출처] 앤서니 티슬턴 『성경해석학개론』 칼바르트편 요약|작성자 Del

https://blog.naver.com/haendel1313/221203019830

 

앤서니 티슬턴 『성경해석학개론』 칼바르트편 요약

배경과 경력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스위스 바젤의 칼뱅주의 전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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