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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의 탈신화화와 본회퍼의 비종교화

2%_Root 2019. 10. 31.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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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신앙을 향한 불트만의 탈신화화와 본회퍼의 비종교화

 

 

신앙이란 무엇인가? 저마다 자기가 믿는 것을 절대적으로 모시려는 신앙의 절대성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오늘날 우리가 신앙을 말하면서 동시에 해석의 과제를 요청받고 있는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실제로, 현대 철학적 해석학이 일찍이 삶에서 참과 앎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고자 했다면, 신학적 해석학은 삶에서 참과 믿음 사이의 거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읽혀질 수 있다.

 

신학적 해석학으로서 참-신앙을 향한 믿음의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신학자 둘을 꼽으라면 불트만 본회퍼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당대의 신앙과 신학의 언어가 현실적 언어의 맥락에서 읽혀질 수 없다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차례로 그들이 해석학적 통찰을 살펴봄으로서 그들이 어떻게 오늘날 현실에 맞갖게 신앙을 성찰했는지를 주목해보도록 하자.

 

먼저 참 신앙을 향한 불트만의 문제의식은 신화적 언어에 있었다. 불트만 당시 근대학문의 정신은 과학의 세례를 받은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정초되어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무언인가가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나 객관적 접근이 가능한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여야만 했다. 그러나 신양성서에는 현대의 과학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는 신화와 신화적 사고방식이 가득 창 있었다. 예수가 물위를 걸었다든지, 처녀의 몸에서 아기가 잉태했다는 것, 귀신을 몰아내거나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은 근대 과학 이후의 세계상에서 볼 때 현저하게 그 역사성이 의심되는 것이었다. 신약학자로서 불트만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객관적 자연인식은 있을 수 있어도 객관적 역사인식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질문한다. 즉 우리는 역사인식이 마치 객관적으로 어떠한 전제나 관찰자의 선입견에 벗어난 사실로서의 역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역사인식은 연대기적인 역사 이전에 개인의 삶의 자리에서의 관심과 선입견을 반영하는 해석으로서의 역사에 가깝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불트만은 학문적으로 정직하게 신양성서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은 이 신화적 언어의 의미를 객관적 사태로서의 사실이 아니라 신앙의 언어로서의 이해에 측면에서 신앙사건의 역사를 기술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양성서는 초대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지 과학적 검증절차로서 사실검증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 불트만은 탈신화화라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주장했다. 당시에 유명했던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해석학에 대해 신학적 단초를 발견한 불트만은 그의 해석학적 통찰을 신학적으로 전유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마치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이나 과학에서 배제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듯이, 불트만도 또한 성서에 대한 기존의 과학적 방법이나 맹목적인 수용에서 배재된 신화의 의미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하이데거가 존재이해를 위해서 그 전단계로 현존재의 실존분석을 시도한 것을 신양성서의 계시사건에 대한 실존분석에 갖다대기 시작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이미 존재이해를 지니고 있는 존재경험의 장이듯, 신앙하는 실존은 신의 말걸어옴에 대해 이미 그의 실존구조 안에서 노출되어 있다. 우리가 신양성서의 저자와 현대시대의 독자 사이의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겪은 계시사건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신양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선포되는 케리그마의 사건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관심은 이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내 안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실존론적 사태로서 케리그마 앞에서 선 인간의 결단으로 읽혀 질 수 있다. 불트만은 우주 안에서 신화론적 언어로 인간의 실존상황을 표현했던 그리스적 인간이해와 같이 오늘날 현대인의 현실에서도 비록 신화론적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해방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물음이 신의 이름으로 전제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약성서의 신화론은 오늘날에도 그 구상적 표현 자체 있는 통일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실존의 이해 속에서 해석학적 순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탈신화화의 목적은 삶의 자리에서 신약의 세계관이라는 잘못된 걸림돌을 제거하고, 신앙의 결단이라는 참된 걸림돌이 드러나게 하는데 있다. 실존론적 결단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실존범주에서 볼 수 있듯이 참된 자유를 위해 비본래적 존재에서 본래적 존재로 넘어가는 실존론적 해후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적용된다면, 그것은 계시사건 앞에서 타락과 죄의 인간 비본래성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본래성으로 결단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처럼 불신앙과 신앙의 실존론적 가능성이 우리 안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피력한 불트만의 계시이해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식대로 소유하려는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로 작용한다. , 계시는 이미 주어져 있고, 결정되어 있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씀 사건 앞에서 매순간 새로이 수행해야하는 결단이며, 희망 앞에 선 인간의 실존을 말하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불트만은 탈신화화를 통해 인격성을 상실해 가는 죄가운데 있는 불안한 현실과 실존을 보며 그 회복은 계시를 통한 선포에 결단함으로서만 인간 실존의 해방에 이른다는 메시지를 통해 삶의 자리에서 계시와 신앙 사이의 거리를 잇고자 했던 신학적 해석학자였다.

 

한편, 참 신앙을 향한 본회퍼의 해석학과 문제의식은 종교적 행위에 있었다. 본회퍼는 불트만과 달리 하이데거의 실존이해를 수용하였는데 비판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인간 실존의 근본적 타락에 있었다. 본회퍼는 종교적 행위는 인간의 자아에서 나온 것이고, ‘신앙은 계시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점을 구별한다. 이는 불트만이 실존론적 결단을 통해 신앙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 전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본회퍼가 불트만이 인간만을 말했고, 시도의 능력을 부정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불트만을 향한 본회퍼의 반대는 계시의 능력이 아니라 총체적 자아(비본래적-본래적)을 설명하려고 하는 불트만의 실존 가능성이 과연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 죄책 속에 존재하는 자아(비본래적 자아)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아(본래적 자아)로 연속적으로 생각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계시에 의한 결단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실존적 결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본회퍼에게 결단은 하나님에 의해 야기된 결단이었다. 그렇기에 자아는 계시에 의해 야기된 결단 속에서 초월적인 것에 의해 초월 안에서 결단을 하는 것이었다. , 자아는 이러한 초월과의 연관 속에서만 존재하지 결코 실존적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본회퍼 당시의 시대는 인간의 자율성이 증대되는 근대의 끝자락 속에서 점점 더 신의 부재를 느끼고 있는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한 신을 말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다. 물론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대에도 있었지만, 본회퍼가 보기에 그들이 이 시대의 자율성의 기준을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다면, 그것 역시 종교적 무신론자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약함을 기초 위에 두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을 등장시키는 것, 인간의 곤궁과 삶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신을 해결사로 등장시키는 것, 세상의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하나님을 점점 배재하고 자신을 위해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신을 정초시키려는 것 모두는 신을 말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신의 이름으로 둔갑한 인간실존의 자율성의 폭력이 있었다. 일명 신의 사유화로 불리는 현대인들에게 신은 의미라는 신으로 자리잡고 있을지언정 정작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회퍼는 종교적 행위로 인해 신의 순수행위가 망각되어 버린 시대의 언어를 단호히 거부하려 한다.

 

이러한 시대의 바탕 위에 본회퍼는 비종교화라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주장했다. 왜냐하면 본회퍼 시대의 종교적 해석은 기독교 신앙을 형이상학적으로 또는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했던 근대 기독교의 역사적인 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회퍼에게 신은 인간의 형이상학적 선험성이나 내면의 종교적 체험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었다.그러한 상황에 본회퍼의 고민은 비종교적 해석의 가능성이었다. ‘종교가 기독교의 한 의복에 지나지 않는다면, 형이상학이나 내면성들의 제약된 전제없이 어떻게 신에 대해 말할 것인가 이는 자율성과 무신성이 동시에 적용되는 시대에서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본회퍼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의 빛에서 해석하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약의 구원론과 달리 구약성서는 개인의 구원 문제를 넘어 이 세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인들의 정수들이 숨겨져 있었다. 따라서 본회퍼는 하나님을 인간의 한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 세계 한 가운데서 신의 고난을 짊어졌던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주어진 삶의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비종교화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신의 곤궁만 생각하고 이웃과 세계의 고난을 외면하는 종교적 해석에서 벗어나, 이웃과 세계의 고난에 뛰어들어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의 신비에 참여하는 신앙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비종교화의 목적은 삶의 자리에서 잘못된 신관념을 제거함으로서 현대인들을 자율성과 책임성이란 강한 장소에서 직접적 신과 대결시키려는데 있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고난은 단순히 하나의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행위를 통해 인식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곧 이 세계의 한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현재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성서에서 말하는 계시를 만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사된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 속에서 선사됨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기동일성의 신-관념을 넘어 타자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본회퍼는 비종교화를 통해 형이상학적이고 내면적인 심리학적 방식을 보며 참된 신과의 만남은 사유화된 종교적 방식이 아니라 타자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리스도의 부르심 앞에 책임으로 응답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었다. 자율성과 무신성의 시대에서 본회퍼는 신없이 신과 함께 삶의 방식을 통해 계시와 신앙 사이의 거리를 잇고자 했던 신학적 해석학자였다.

 

ㅡ. 대학원 종합고사를 준비하며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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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 탈신화화 공부

요약된 글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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