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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근 신학에서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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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학에서의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오상호
Fred Sanders, Entangled in the Trinity: Economic and Immanent Trinity in Recent Theology, dialog: A Journal of Theology 40/3 2001 Fall
Fred Sanders is Assitant Professor in the Torrey Honors Institute at Biola University in La Mirada, California.
John Donne의 Holy Sonnet 16에는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표현이 있는데 그 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의 유익들을 자유롭게 나누기 때문에 격찬하면서 동시에 "해결곤란한 삼위일체에 있어서 그의 유산"(his jointure in the knotty Trinity)을 견지한다. Donne의 은유는 삼위일체를 복잡한 매듭으로 그리는데,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인격들을 서로 간에 구별되게 묶여 있는 것으로, 서로간에 분리될 수 없는 결합 안으로 땋여있거나 엮여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의 그림은 이상하고(odd) 심지어 깜짝 놀랍다(startling). 그러나 "해결곤란한 삼위일체"는 순환 교리의 시적 표현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의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학의 중심적 관심으로 오랫동안 취급된 삼위일체의 인격들의 이러한 순환적 상호 침투(this perichoretic inter-penetration)이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어려움 업무는 전통적으로 어떻게 "이들 세분이 한분인가"라는 것에 대한 논쟁이었다.
비록 삼위성과 일원성을 화해시키는 임무가 여전히 현재의 신학에서도 지배적이지만(특별히 그것은 심리적 유비와 사회적 유비 사이의 선택을 나타낸다), 최근 수십 년 간 신학자들은 "삼위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관계성"이라는 조금 다른 질문에 집중한다. 과거 삼위일체주의 자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을 함께 묶는데 사용되는 더욱 적절한 매듭을 찾았지만 이제는 삼위일체와 세계를 서로서로에 대하여 확실하게 하는 새롭고 증진된 방법을 찾는다.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적 신학이 동시발생적으로 신학적 토론의 표면에서 신학적 토론의 중심의 새로운 이동을 경험했다 라는 것은 단순한 일치가 아니다. 해결곤란한 삼위일체는 우리 역사 안으로 그 자체를 솜씨좋게 엮어넣고 과거 반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신학적 작업의 일부는 이러한 매듭들의 복잡함과 얽힘들을 따르는데 노력했다.
Rahner' Rule
세계에 삼위일체를 묶는 실을 추적하려고 시도한 이들 가운데 주요인물은 Karl Rahner인데, 그는 현대에 있어 이 교리가 소멸해가는 상태는 이미 고전적이 되었다라고 한탄한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일반적인 일신론(monotheism)으로부터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과서와 교리문답서에 모셔져 있지만 그러나 신앙과 실천에서는 무시된다. 만약 삼위일체주의가 교회의 역사로부터 소급되어 삭제된다면 기독교문헌 대부분은 변하지 않고 남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교리는 오직 "머리와 가슴의 교리문답"에 오직 희미한 흔적만을 남길 뿐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에서 삼위일체교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의의 거의 말미로 자신의 자리를 은퇴시키고 한번 취급된 것은 창조, 은혜, 구원 혹은 종말론과 같은 수반되는 교리들에 대한 형성하는 능력(formative power)를 실행하지 못하면서 "결코 다시 되풀이되지는 않는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부분의 기독교 교리는 unitarian적인데, 왜냐하면 삼위일체적 관심들은 전체 신학적 체계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록 이 신비가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드러났고 심지어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진 이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그 자체 안에 갖추어져 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진술하지만 그러나 실재로 그것은 우리와는 전적으로 관계가 없다."
이러한 불평과 함께 라너는 그의 작은 책 The Trinity를 시작한다. 그는 단지 불평하는 것 이상을 의도한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을 제시하려고 하는데, 그 해결은 그의 탄식만큼 모범적이다. 라너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그 자체 안에 있는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아들의 성육신과 성령의 보냄과 같은 구원역사 안에서의 삼위일체적 증거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가장 그리고 궁극적으로 중요하게 취해져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서 발생한 것은 세계의 역사에서 삼위일체의 인격들중 하나의 나타남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돌입(irruption)은 그 자체 안에 있는 영원한 삼위일체의 참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성령의능력안에서 아버지에 의하여 보내어진 아들에 대하여 읽는다; 이것은 구원 경륜에서 일하시는 삼위일체, 즉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복음서에서 우리가 만나는 삼위일체와 영원으로부터 그 자체 안에 있는 삼위일체즉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우리는 그 자체 안에 있는 삼위일체와 구원역사의 삼위일체 사이에 어떠한 간격이나 모순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요약하면서 라너는 다음과 같은 공리로 그의 가장 중요한 삼위일체적 선언을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고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이들 열 다섯 단어는 Rahner's Rule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그것들은 수천 페이지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상 최근의 주요 삼위일체적 신학자들은 모두 Rahner's Rule의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는데 주목할 만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으로 영원한 삼위일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한편으로 구원역사에서 삼위 하나님의 나타남이 무엇인지 그리고 전자는 후자이다라는 주장을 통하여 그것들은 그 역의 관계성에서도 같은 것인가? 그래서 그 자체 안에 있는 삼위일체를 우리 경험에서의 삼위일체와 동일시하는 의미들, 즉 우리를 위하는 하나님과 그 자체 안에 잇는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의미들은 무엇인가?
Starting with Christ
칼 라너에게 있어 그것은 삼위일체적 신학을 되살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Rahner's Rule은 이전에 추상적 개념들과 사변들로 떠내려가기 시작한 교리를 취하여 확고하고 구원 역사의 유일한 기초 위에 뿌리를 내리게 때문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공리적 동일화를 준비하면서 라너는 그의 전체 신학적 작업에 더욱 삼위일체적인 윤곽을 놓는다. 이러한 언질은 그가 선택한 성육신에 대한 고찰이라는 출발점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 본질을 취하는 이 임무를 실행한 것은 삼위일체의 다른 인격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성육신한 하나님 아들로서 보여준 그 인격은 사실상 영원한 삼위일체 안에서 개별적 인격으로 선재한 하나님의 동일한 아들이다; 요한의 용어로, 육신이 되신 말씀은 처음에 있었던 그 말씀이다. 다른 말로 하면, 경륜적 Logos는 내재적 Logos이다. 라너는 삼위일체의 어떤 다른 인격이 성육신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하여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아버지나 성령은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오직 아들만이 말씀, 계시,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과 표현을 인격적 특징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전체 주장은 중세 교리적 책에서부터 논의된 질문과 같이 들린다: Whether Any Person of the Trinity Could Have Become Incarnate. 사실 이 정확한 의문은 스콜라 학자들이 제기한 것이다. Augustine부터 Aquinas에게까지 한 가지 분명한 답은 전통적으로 일치되어 제시되었다: 삼위일체의 어떠한 인격이라도 성육신을 포함한 어떠한 경륜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아버지 혹은 성령은 성육신할 수 있었고 이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물론 라너는 이러한 전통적 입장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를 취하는 것은 이 중요한 점에서 전통으로부터 결별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믿었다. 삼위일체의 어떠한 인격이라도 성육신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No라고 대답하는 어떤 신학자는 사실상 Rahner's Rule이라는 것을 가장 그렇듯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 중요성을 가지고 경륜적 임무들을 취하는 데 포함된 첫 번째 것이다: 그것들을 삼위일체의 인격들을 구성하는 내적인 삼위일체적 발현들과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This is the first thing entailed in taking the economic missions with ultimate seriousness: to interpret them as necessarily continuous with the inner-trinitarian processions that constitute the persons of the Trinity). 라너는 그 원리는 또한 성령을 위한 적절한 임무를 포함하는데에도 확장될 수 있고 그 결과 세 번째 인격은 성령의 적절한 인격성(personhood)의 구별되는 특징인 구원 역사에서 사역들을 완성한다 라고 주장한다. 성령의 이런 적절한 역할이 오순절에 오심, 신자들의 마음에 거주함, 교제 안에서 공동체를 함께 묶음 혹은 라너의 용어로 창조되지 않은 은혜의 현존으로서 정의되든지 간에, Rahner's Rule은 경륜에서 성령의 현존은 또한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의 신 내적인 역할의 분명한 확장으로서 보여져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Rahner's Rule은 한번에 두 방향으로 나아간다. 한편으로 그것은 신학의 초점을 내재적 삼위일체에서 빼앗아 그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로 바꾼다. 성경에서 증언된 것과 같이 경륜적 삼위일체는 신학적 관심의 완전한 무게를 나타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단지 내재적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규칙의 공리적 특징은 만약 이 둘이 사실상 단지 동일한 것이라면 이들 두 실재들이 구별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라너의 규칙은 현대 신학자들을 옛 전통이 알수 있다라고 주장한 것보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내적 사역들에 대하여 더울 많이 알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입장에 놓는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 내적 발현들이 경륜적 사역들의 특징을 받아쓴다는 것을 알고 그러므로 우리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어떤 것들을 상술할 수 있다. 이것은 더 큰 역전보다 오히려 더욱 세밀한 내재적 삼위일체 신학으로 인도되는 듯하다. 그래서 심지어 라너 자신에게서조차 우리의 관심을 이제 내재적 삼위일체로 더욱 이끌거나 덜 이끄는 그 규칙의 공식화와 실행에 건설된 불확정성과 불안정이 있다.
Tightening the Knot Between God and World
만약 라너 자신이 그의 공리를 두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1967년에 그의 논문이 출판된 이후 시작된 논의의 본질을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책이 출판된 직후 삼위일체적 신학자들은 어떻게 라너의 규칙을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로 넘어갔다: the tight interpreters and the loose interpreters. 이런 진행중이 논의는 단지 라너에 의한 수십 년간 오래된 언급을 해석하는 일련의 저널논문들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은 최근 수년간 주요 삼위일체적 계획들의 배경을 형성한다. 어떻게 신학자들이 라너의 규칙을 해석하느냐라는 것은 조직신학적 관심들의 전체 단계에 특별한 특징을 주는데, 그것은 라너의 규칙은 두 가지 형태의 삼위일체적 신학 사이에 분계선으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두 그룹중 하나는 그 규칙을 하나님과 세계를 함께 취급하는 첫 번째 좋은 발걸음으로 읽지만 그러나 라너가 이런 방향으로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저작에서 그들은 라너의규칙을 그 논리적 결론들로 나아가게 시도한다. 우리는 먼저 tight interpreters를 취급할 것이다: Piet Schooenenberg, Hans K ng, J rgen Moltmann Wolfhart Pannenberg, Catherine Mowry LaCugna.
라너의 규칙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가장 유익했다. 그것은 화란 Jesuit 신학자인 Piet Schooenenberg에 의해 주어졌다. 그의 기여는 강력하게 삼위일체주의의 단어들을 형성하는 각각의 특별한 개념들에 그 규칙을 적용한 것이다(인격, 임무, 발현, 관계 등). 이 움직임은 다음과 같은 필연적인 결과들을 생산했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적 아버지되심은 신내적인 아버지되심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구원 경륜적 filiation(친자관계, 파생)은 신 재적인 filiation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임무들은 발현들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구원경륜적 관계들은 신 내적인 관계들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 공리가 이러한 각 항목들에게까지 확장될 때, 다른 방법으로는 주목되지 않는 문제들이 분명해진다. 이 설명에서 삼위일체는 세계 역사의 과정에서 발생한 관계들에 의하여 처음 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의 filiation은 오직 나사렛 예수의 순종하는 삶에서만 아들됨으로부터 나와 아버지에게로부터 발생하는 것 같고, 고전적 기독론에서 주장된 선재 혹은 영원한 출생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전통적 기독론은 영원한 발현과 경륜적 사역 사이에 적합을 언제나 주장하지만 그러나 단순하게 발현이 사역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일 때 삼위일체 그 자체는 오심의 과정의 결과가 되는 듯 하다. 삼위일체기 그렇게 전적으로 "경륜화"될 때, 하나님의 삼위성(triunity)은 세상에 의존한다. Schoonenberg는 만약 구원 경륜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지만, 그러나 그 경우에 삼위는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언급되어야만 한다. 역설적으로 라너의규칙에 대한 Schoonenberg의 분명한 급진화는 그것은 무엇보다도 modalism일지도 모르는 매우 약화된 삼위일체인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생산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삼위이지만 그러나 우리 없이는 단지 일자이다(God is triune for us, but merely monadic without us). 이 문제의 뿌리는 만약 내재적 삼위일체가 세계의 역사 안으로 흘러넘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상적인 업무일 수 있다 라는 Schoonenberg의 놀라우리만큼 순진한 가정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의 결론들을 이끌어 내면서 그는 라너의 규칙에 "신적 존재"의 개념을 종속시키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만약 삼위일체적 개념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본질, 즉 신적 ousia는 무엇인가?
Hans K ng에 의하여 유사한 변경이 라너의 규칙에 주어졌다. 그는 이 변경으로 모든 삼위일체적 사변으로부터 일종의 독립을 선언한다. 만약 단순히 내재가 완전히 경륜이라면 그때우리는 그 자체 안 있는 삼위일체를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고 그는 주장한다. 신학은 하나님의 "가장 내적인 본질(innermost Nature)"과 "삼위 하나님의 정적이고 자족적인 본질(static, self-sustaining essence of a triune God)"과 함께 그 긴 매력(fascination)을 끝낼 수 있다. 대신에 우리는 좀더 신약 성경에 가깝게 말하는데 자유로운데 그것은 "그 자체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수 그 자신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동하시는 것으로써 거기에 우리의 구원의 실재가 의존하는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다. K ng과 함께, 라너의 규칙은 더 이상 더욱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신학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아니라 구원 경륜을 조금이라도 넘어서 어떤 것을 반영하는 것을 막는 장벽이고 그 장벽에 쓰여진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K ng이 사색하는 것에 대한 그의 거부를 위하여 인용하는 정당한 근거가 무엇이든지 간에(그리고 그는 사실상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일종의 헤겔주의에 호소할 수 있는데), 라너의 규칙을 장벽으로 만듦으로서 그는 삼위일체적 주장들에 내재하는 형이상학을 통하여 사고의 도전에 대처하려는데 간단히 실패하는 위험으로 나간다(he runs the risk of simply failing to rise to the challenge of thinking through the metaphysics implicit in trinitarian claims). 존재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는 삼위일체적 신학에 있어 아주 오래된 유혹이다; 그것은 첫 번째 ecumenical council에서 논점이 되었던 것이다. As with the specter of modalism in Schoonenberg's work, it seems odd to undertake a radicalizing of Rahner's Rule only to come around at last to a sub-Nicene theology which could have been had more directly(Schoonenberg의 저작에서 양태론에 대한 의심과 함께, 그것은 오직 더욱 직접적으로 sub-Nicene theology로 마침내 방향을 돌린 라너의 규칙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을 수행하는데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Tying Human Relations to Divine Relations: Moltmann
라너의 규칙에 대한 이러한 초기의 언급들로부터 우리는 이제 그 공리에 대한 유사한 해석들에 의하여 비롯된 세 가지 중요한 기획들로 돌아가자. J rgen Moltmann은 그의 경력 대부분 라너의 규칙에 매혹되었고 반복적으로 그것을 붙잡는다. 이미 1974년의 The Crucified God에서 그는 구원역사에서 중심적 사건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륜적 삼위일체 그 자체에 서있는 어떤 것으로써 세우는 길을 추구했다. "십자가의 신학은 반드시 삼위일체 교리여야만 하고 삼위일체 교리는 반드시 십자가의 신학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있는 책 The Trinity and the Kingdom을 쓴 이후, 그는 라너의 규칙을 그 자체로서 문제의 한 부분임을 보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몰트만의 견해에서 간단히 제거되어야 하는 분명한 구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몰트만은 라너의 규칙이 더욱 급진적 요점(경륜적 삼위일체로의 비약적 집중)뿐만 아니라 더욱 보수적 요점(내재적 삼위일체의 확언에 대한 주장)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해석적 명료함을 이루고 그 자신의 저작을 그 공리를 넘어서까지 나아가게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교리가 전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오래될수록, 몰트만의 견해에서 그것은 경륜적 삼위일체로부터 신학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할 것이다.
이것은 전체로서 전통적 신학이 본질적으로 idealist 혹은 플라톤적 경향을 가지기 때문인데, 그것은 결코 존재의 높은 영역((a higher realm of being)과 되어감의 낮은 영역(a lower realm of becoming) 사이의 대조라는 가정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이러한 범주들 안으로 억제될 때,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는 존재의 영역을 점령하고 반면 "우리를 위하는 하나님"만이 되어감의 세계에 나타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철저하게 내재적 삼위일체에 종속된다. 플라톤은 시간을 영원의 움직이는 형상으로 묘사하고 전통적 신학은 그에 따라서 경륜적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의 유한과 변화의 조건들 아래 희미하게 반영된 움직이는 형상으로서 그려낸다. 이와 반대되게 몰트만은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제적 삼위일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것에 소급되는 영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몰트만의 주장은 도발적이고 그 동기는 분명하지만,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경륜적 삼위일체의 소급되는 영향은 방어할 수 있는 주장인가? 만약 그것이 구원 경륜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구성된다면 내재적 삼위일체는 무엇이 되는가? 내재적 삼위일체가 먼저 존재하고 원래의 내재적 삼위일체을 더 (소급적으로) 조건짓는 두 번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 자체를 경륜적으로 규정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논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재적 삼위일체 그 자체가 시간적 전체에 아직 함께 모여지지 않은 역사적 사건들의 미래적 정점일 뿐이라면, 그 과정을 출발하게 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없다. 몰트만은 관계성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주도권의 위압적인 지배를 조절하는 자신의 임무를 성공한다. 그러나 만약 내재적 삼위일체의 확정된 존재가 구원 역사의 결과를 기다린다면, 주도권 전부는 rudgs적 삼위일체로 비약한다. 그러한 움직임은 상호작용없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여전히 움직이지만, 그러나 몰트만은 그런 움직임의 흐름을 역전시킨다.
Binding the Future to the Tresent: Pannenberg
Wolfhart Pannenberg는 이러한 동일한 질문을 가지고 작업하고 그것을 자신의 Systematic Theology에서 발전시킨다. 라너의 규칙은 판넨베르그의 거대한 기획에서 핵심적 생각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사실상 판넨베르그는 신학적 주제들의 전체 범위에서 그 공리가 가지는 의미들을 강조한 첫 번째 신학자이다. 심지어 몰트만보다 더욱 분명하게 판넨베르그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위하여 역사와 종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구원경륜은 그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고 종말적 미래가 오기 전까지 그 완전한 특징을 확정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만약 경륜적 삼위일체가 참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한다면, 그것은 종말론적으로 완성된 경륜적 삼위일체여야만 하고 종말에 증명될 시간적 전체성이다. 다른 말로 하면, 판넨베르그는 라너의 규칙을 중요한 종말론적 조건을 가지고 확증하기를 원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최종적으로 동일시될 것이다. 그러나 판넨베르그가 유명한 것은 세계의 종말을 단순히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 전체성이 선취적으로(proleptically) 나타났다는 것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죽음으로부터 일어났을 때, 마지막 말에 대한 범주적 사건은 선취적으로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라너의 규칙에 대한 논의에 이러한 예상적인 사고방식을 집어넣음으로서 판넨베르그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의 복잡한 관계성은 역사적 자기-실현화의 실증(an instance of historical self-actualization)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실현화가 발생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행동의 처음부터 나는 그 행동을 그 행동의 결과가 되는 결정(determination)과 완전한 의미에서 동일시한다." 우리가 언제나 되어감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간들은 결코 자기 실현화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사역들 안으로 세상을 넣음으로써 역사적 자기 실현화를 경험할 수 있고 경험하신다. 세계 역사의 과정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은 미해결의 것이고, "사건의 과정들은 아들과 심지어 아버지의 신성에 관하여 결정된다(God's rule is debatable, and "the progress of events decides concerning......the deity of the Son" and even of the Father."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삼위일체는 구원경륜에서 전후로 개입하고 구원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참된 되어감을 경험하는 그 자체일 수 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은 판넨베르그도 인정하듯 역설적이다: 비록 역설이 다른 방법으로는 그의 저서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이지만 말이다.
하나님의 자기 실현화라는 사상을 판넨베르그가 사용할 때, 그리고 미래의 예상적 나타남에 대한 그의 특징적인 호소에는 많은 것이 불분명하게 남아있다. 비록 신적 삶을 세계의 역사적 실재와 통합하려는 그의 욕망이 분명하지만 판넨베르그는 그 매듭을 너무 꽉 묶으려는 시도의 위험을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주장하고 그의 체계가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의 결과이고 그종말론적 완성에서만 실재를 달성한다는 것과 같이 역사 안에서 되어가는 신성에 대한 생각의 반박이라고 믿는다". 그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인정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또한 구별도 주장한다. 사실 그는 이 주제를 그의 삼위일체적 신학에서 최종적 언급으로 선택한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별성과 단일성은 신적 사랑의 심장박동을 구성하고 그런 심장박동의 신호와 함께 이 사랑은 피조물의 전 세계를 포함한다."
Knotting God in se to God pro me: LaCugna
만약 라너의 규칙을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것은 Catherine Mowry LaCugna인데, 그녀는 1991년 자신의 책 God for Us에서 그렇게 했다. 라쿠그나는 삼위일체주의를 그리스도인의 삶과 다시 연결하기를 원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책에서 라너의 규칙에 대한 "신학은 구원론과 분리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라는 그녀의 독특한 방법적 변형을 따라 역사적 신학, 예전, 영성 등에 대한 반성을 제공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 공리를 독해하면서 그녀는 "경륜적 삼위일체나 내재적 삼위일체는 없다; 오직 신간, 공간, 역사와 인격성 안에서 theologia의 신비의 분명한 실현화인 oikonomia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하여 일반적인 논쟁의 범주들을 범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삶에 대한 설명이다. 하나님의 구성에 대한 어떤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요약한다.
그녀의 입장을 일종의 경륜적 혹은 구원론적 축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사고의 결과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만약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생각이 삼위일체라고 한다면,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가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메시지는 그 자신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이 점에서 그녀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상 그 자체에 반대하는 열려진 논쟁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의 전체 기획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서가 아니라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질문이 주제가 될 수 없다는 그런 방법으로 신학적 임무를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가장 잘 이해된다.
Divine Freedom: A Little Slack in the Line
라너의 규칙에 대한 단단한 해석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과 세계의 구원의 역사는 실제로매우 가깝게 서로 묶인다. 사실 그 매듭은 두 가지 실재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융합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매우 단단하고 복잡하다. 라너의 규칙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그룹-Yves Congar, Walter Kasper, Thomas Torrance-은 최근 신학의 이런 경향을 주목하고 몇 가지 전fir적 요점들에서 이 매듭을 느슨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Yves Congar는 라너의 규칙에 응답한 초기 신학자들 중 한명이다. 그는 그 공리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우리 가운데 계신 아들과 성령의 사역들에 기초하는 방법으로 가능하게 된 삼위일체 신학의 재방향설정에 열심을 가졌다. 성육신과 기독교공동체에 대한 성령의 오순적적 거주하심의 경우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부인할 수 없이 함께 존재하셨다. 그러나 Congar는 신학적 혼동의 세계는 그 공리의 두 번째 절반에 숨어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생각한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다라는 것은 계시의 최종성에 대한 인식론적 주장이지만 그러나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주장까지 나아간다. "경륜의 자유로운 신비와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의 필연적인 신비가 동일시될 수 있는가?" Congar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러한 두 신비들이 서로 안으로 붕괴되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기 위하여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우리의 능력을 위태롭게 한다고 지적한다. 간단히 제시하면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아들을 가졌을 것이다." 라너의 규칙의 후반 절반을 확인하는 것은 또한 너무나 많이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중요한 구별들의 다수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성육신이 피조성의 표지 아래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 우리에게 자신을 비우고 겸양의 베일 뒤에서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적 자기 계시는 종말이 되기 전까지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경륜적, 드로난 삼위일체와 영원한 삼위일체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라너의 규칙의 후반 절반은 그런 구별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한다.
이 공리에 대한 Walter Kasper의 반응은 Congar의 반응과 유사하다: 그는 되살아난 삼위일체주의에 대한 그 약속을 위하여 그것을 환영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도움보다는 더욱 문제가 있게 되도록 하는 어떤 잘못된 해석을 경계한다. Kasper는 라너의 규칙에서 "이다"(is)는 결코 마치 그것이 경륜과 내재적인 것 사이의 단순한 동일시를 세우는 것이고 역으로도 동의어인 것과 같이 이해되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가 다른 하나이다라고 적절하게 말해지지만 그러나 오직 동일시의 조건을 분명하게 제한하고 한계지울 때에만 매우 가까이 관계된다. 경륜 안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의 나타남(presence)은 다른 방법으로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에서 일어난 반드시 "추론할 수 없고, 자유롭고, 은혜로운 역사적 나타남"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Kasper는 그공리에 대한 이러한 재공식화를 제시한다: "경륜적 자기전달에서 삼위일체 내적인 자기 전달은 새로운 방법으로, 즉 역사적 말들, 표시들, 활동들의 베일 아래에서와 궁극적으로 나사렛 예수라는 그 사람에게서 세계에 나타난다." Kasper의 형식은 라너의 공식의 조촐함이 빠져있고 그래서 누구든지 이것을 카스퍼의 규칙이라고 말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라너의 규칙의 해석과 적용을 지내하는 어떤 필수적인 구별들에 제시되는 잇점을 가진다. 조건화한 사실들에 대한 Congar의 목록에 대하여 Kasper는 주요한 것을 덧붙인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성례적 나타남이다.
라너의 규칙에 대한 적절한 동의에서 나온 최근의 신학적 기획은 Thomas Torrance의 작업이다. Torrance의 두드러진 바르트주의는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단일성과 구별성을 인정하려는데 관심을 가진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관계되는데, 비록 Torrance가 그것들을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복음적 삼위일체라고부르기를 더 선호하지만. 그의 신학 전체를 통하여 Torrance는 존재론적 삼위일체론의 우선성을 주장하고 복음적 삼위일체의 구원하는 특징은 하나님의 삼위적 존재의 위협당하지 않는 존귀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의하여 우리를 구원하지만, 그러나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존재"는 자비롭게 신적 삶의 내적인 순서에 접속하는 것을 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한 삼위일체는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삼위일체 존재에 의하여 구원을 행하신다.
The Economic Trinity as Image of the Immanent
이 두 번째 신학자들의 그룹-느슨한 해석자들-이 무엇보다도 강조하는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성은 라너의 규칙에 대한 어떤 해석들이 지적하는 것보다 덜 직접적이다 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는가와 어떻게 실제적으로 신적 삶의 최상의 자유와 초월성에서 하나님이신가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허락하는 화해 원리"를 찾으려 하고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 조화와 일치와 동의와 융화"를 확정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단순한 유사성에까지는 이르지 않기를 원한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너무나 가까이 묶는 것은 신적 존재를 세계 과정 안으로 붕괴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유를 식별하지 않는 것이고, 피조된 세계에 하나님의 자기-실현화의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다.
오직 한 삼위일체만 있고 그 삼위일체는 구원 역사에서,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서 참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의 경륜적이고 내재적 삼위일체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자유는 신학적 공식들에 의하여 정당하게 인정되어야만 한다. 현재의 삼위일체적 논의에 포함된 사람들은 우리가 강력한 끈과 치밀한 매듭으로 삼위일체를 묶는다 라는 것을 확정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세계가 너무 바싹 죄이지는 않을까 하여 그 선에서 어느 정도 느슨함도 필요하다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러한 느슨함은 다양한 신학적 프로그램 아래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인정될 수 있다: 그것은 kenotic, sacramental하게 서술될 것이고, 바로 계시의 활동에 가려질 것이고, 종말론적이기보다는 역사적으로 혹은 피조성에 의해 제시된 조건들 아래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서술될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이지만 간접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특별히 성과가 있는 방법은 도상의 유서깊은 기독론적 범주(the venerable christological category of icon)를 통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그리고 그리스도만이)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과 같이, 구원역사에서의 삼위일체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한없는 삶인 사랑의 영원한 관계성에 접속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라너의 규칙에 대한 지나치게 자신있는 지원은 하나님과 세계를 복잡함과 얽힘과 꼬임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그 규칙이 더욱 온건한 방법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고에서 너무나 쉽게 무시되어 온 진리를 더욱 강력하게 일깨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 하나님 형상으로의 우리의 새롭게 됨, 우리의 구원은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매듭이 많은 삼위일체"에 관계되도록 가능하게 만드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출처 : http://sorinara.org/zbxe/?mid=common_dogmatic&sort_index=regdate&order_type=asc&page=1&document_srl=1512

출처: https://lewisnoh.tistory.com/entry/최근-신학에서의-경륜적-삼위일체와-내재적-삼위일체 [Post Tenebras Lu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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